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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캉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은 1993년 4월 15일 리지외에서, 18일 에루빌에서, 20일 아브랑슈에서
씌어졌다. ‘르미루아르’라는 음식점에서는 디저트로 커피 아이스크림을 선택할 수 있었다. 미셸 르베르디는 망설였다. 나는 ‘그날의 파이’를
골랐다.” (p.17)
소설은 세 개의 챕터로 나뉘어져 있다. 첫 번째 챕터인 <아이슬란드의 혹한>은 작가가 이 책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을 쓰기 전과 후의 상황을 다루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그 사이에 이 책이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 시작은 작가의 어린 시절의
기억에 맞닿아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 작가는 두 번 말을 잃은 적이 있고, 작가의 첫 번째 작품의 제목은 《말 더듬는
존재》였다.
“... 내가 언어의 망각을 발단으로 줄거리가 전개되는 어떤 동화의 기본 골격을 이야기했다... 음악가들은 어린애나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이런 결함의 주민들이다. 어린애는 유년기enfance 라는 단어 자체가 의미하는 바인 이 결함 속에서 최소 7년을 거주한다. 음악가는
노래를 통해 이 결함에서 벗어나려 애쓴다. 작가는 이 끔찍한 공포의 영구 주민이다. 간단히 정의하면 자가란 언어가 마비stupor된 자이다.
대다수의 작가들이 이런 마비 상태로 인해 설상가상으로 음성 언어 자체마저 불가능해지는 일을 겪는다. 장 드 라 퐁텐은 자신이 쓴 우화를 직접
낭송하는 것을 포기하고, 그 일을 가슈랴는 이름의 배우에게 맡겼다...” (p.10)
두 번째 챕터인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은 우화이다. 콜브륀은 죈느와 결혼을 하고 싶어하는 여인이고, 아이드비크 드
엘Heidebic de Hel 이라는 이름을 가진 영주의 도움으로 죈느와 결혼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영주는 한 가지 제안을 한다. 일 년이
되는 날,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콜브린은 영주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콜브륀은 결혼을 하여 죈느와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지만
어느 날 문득 자신이 영주의 이름을 잊었음을 자각한다. 콜브륀은 죈느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죈느는 이 영주의 이름을 알아내기 위한 여정에
오른다.
“그가 아내를 품에 안자, 아내는 이름을 알아냈느냐고 물었다. 그가 이름을 막 말하려는 순간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다. 이름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거기, 아주 가까운 곳에, 그의 혀끝에서 맴돌고 있었다. 그의 입 주위에 그림자처럼 떠돌고 있었다. 입술 끝에 더
가까워지기도 더 멀어지기도 했다. 그런데 막상 아내에게 이름을 말하려는 순간 이름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말았다.” (p.50)
죈느는 여행을 통해 이 영주의 이름이 아이드비크라는 사실을 알고 기뻐하며 집으로 돌아오는데, 콜브륀 앞에 서는 순간 다시금 그
이름 아이드비크를 잊었음을 알게 된다. 죈느는 결국 다시 여행길에 오른다. 그렇게 영주가 말한 일 년이 되어 가기 직전, 죈느는 세 번의 여행
끝에 가까스로 콜브륀에게 영주의 이름을 말하고, 직후에 나타난 영주는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여 말하는 그녀 앞에서 비명을 지른다.
“...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은 언어가 우리 내면의 반사 행위가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단어 하나를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은 언어가 곧 우리 자신은 아니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우리가 지닌 언어는 획득된 것이다. 그것은 언어를 버릴 수도 있다는 뜻이다. 우리가
언어를 버리는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우리의 혀 끝에서 무슨 언어든 떠오를 수 있다는 의미이다...” (p.66)
두 번째 챕터가 우화라면 세 번째 챕터인 <메두사에 관한 소론>은 언어에 대한, 문학에 대한, 시에 대한 작은
논문이라고 할 수 있다. 아내를 지상으로 데려오다 뒤를 돌아보는 바람에 돌이 된 오르페우스가 나오고, 돌이 되지 않기 위하여 방패를 이용하여
메두사의 목을 자른 페르세우스가 등장한다. 운명 혹은 반운명일 수도 있고, 혹은 반운명조차 운명의 손바닥 위일 수도 있다, 는 어떤 속절없음을
읽는 것만 같다.
“글쓰기, 그것은 잃어버린 목소리 듣기이다. 수수께끼의 답을 찾아내어 그것을 알아맞힐 시간 갖기이다. 잃어버린 언어 안에서
언어를 탐색하기다. 거짓말 혹은 대체물과 알 수 없는 지시 대상의 불투명성 사이에 벌어진 틈새를 끊임없이 편력하기다...” (p.109)
현실의 틈을 벌려 그 사이에 우화를 밀어 넣었고, 그것이 발아하여 하나의 문학론이 되어버린 것만 같다. (번역을 맡은 송의경은
옮긴이의 말에서 이 작품을 하나의 시학(詩學)으로 읽었다고 말한다. 동의한다.) 망각과 기억이, 랑그와 파롤이, 잃어버리거나 되찾는 글과 말이
파스칼 키냐르에게서 연원을 공유하게 되는 것만 같다. 어쩌면 내게는 파스칼 키냐르의 책들이, 글에 대한 나의 ‘기능 부전’을 거스르게 만들어줄
오르가슴의 원천일 수도 있으리라...
“시(詩)란 오르가슴의 향유이다. 시는 찾아낸 이름이다. 언어와 한 몸을 이루면 시가 된다. 시에 대해 정확한 정의를 내리자면,
아마도 간단히 이렇게 말하면 될 듯싶다. 시란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의 정반대이다.” (p.84)
파스칼 키냐르 Pascal Quignard / 송의경 역 /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 (Le mom sur le bout de la langue) / 문학과지성사 / 143쪽 / 2005 (1993)
2003년 발간된 떠도는 그림자들 이후 2년만에 소개되는 키냐르의 동화 같은 소설, 에세이 같은 동화이다. 키냐르는 다름 아닌 이 동화를 선택해 삶의 철학과 도덕, 인간의 원초적 욕망과 육체적 성이 충돌하여 발산시키는 슬픔과 기쁨, 절망과 환희를 환상적으로 조율해냈고, 자기 글쓰기의 본질이자 특장인 또 하나의 색다른 소설 세계를 구축해냈다. 한 편의 신화 같은 이야기로 순식간에 독자를 사로잡아버리는 키냐르는 이로써 다시 한 번, 살아 있는 프랑스 문단의 최고의 지성 으로 우리들 뇌리에 각인될 것이다.
아이슬란드의 혹한
혀끝에서맴도는 이름
메두사에 관한 소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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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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